빈 무대 위에 소영이 올라온다. 소영은 엉거주춤 주저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는다. 소영,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소영: 기문을 우려 마시다가 네 생각이 났어.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었을까? 제주의 어떤 찻집에 들렀다가 이 기문을 샀어. 제주 홍차를 사고 싶다고 하니까 찻집 사장님이, 올해 홍차는 별로 추천드리지 않아요, 올해는 이 중국 기문이 달아요, 그러면서 냄새를 맡아보라더라. 나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사장님한테, 고구마 향이 나네요, 그랬어. 나는 결국 제주에서 중국 기문을 사왔어.
소영, 얼굴을 무릎 사이에 잠시 묻는다. 소영, 다시 편지를 읽는다.
소영: 나는 자꾸 막 우리고 난 젖은 찻잎의 냄새를 들이켜. 마른 찻잎의 냄새를 맡으면 너가 생각나지 않는데, 젖은 찻잎의 냄새에는 너가 있어. 축축하고 아찔한 단내를 맡으면서 나는 생각해. 인간의 섹스에서 이런 냄새가 났다면 인간은 전혀 다른 종이 되었을까. 우리가 섹스를 아주 많이 했다면 덜 고통스럽게 헤어졌을까. 마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했다면.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을 때까지 아주 지겹도록 했다면.
소영,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소영: 내 찻자리는 웃겨. 바닥에 대충 깐 이케아 행주, 어디서 얻어온 싸구려 찻주전자, 1리터짜리 파이렉스. 나름대로 찻상을 차릴 때마다 네 찻상을 생각해. 물이 빠지는 원목 찻상과 원숭이 차총들. 그 위를 적시던 완벽한 물줄기들. 왜 원숭이와 차를 마시냐고 내가 물었지. 나는 너만큼 말을 기억하는 재주는 없지만 너는 아마 나에게,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가까워서 그런지 편안함을 줘, 그렇다고 인간 모양의 차총과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난 후에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봤어. 원숭이를 보면서 생각했어. 너는 좀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나는 너를 사랑한 게 아니라 무서워한 것 아니었을까.
소영, 숨을 몰아쉰다. 편지를 읽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계속한다.
소영: 나는 요새 차를 우려서 사과주스나 블루베리 잼을 섞어먹기도 하는데, 가끔 너가 한 적 없는 잔소리가 들려. 야만적이야, 용납할 수 없어, 뭐 그런. 너가 이 편지를 들을 일은 없겠지만, 여기까지 듣는다면 알겠지. 너와의 기억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너는 내 앞에 없는데, 나는 네 앞에서 여전히 눈치를 보고 서 있어. 나는 네 앞에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돼. 이만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거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어서. 누가 너의 차총들이 원숭이가 아니라 싹 다 거북이였다고 말해도 나는 아, 그랬을 수도 있겠다, 수긍할 거야. 그치만 너가 차를 마셨다는 사실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보다도 확실해. 안 그러면 내가 차를 마시고 있을 리 없으니까.
소영, 편지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