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1일 [[이재윤|재윤]]과의 순간들에 관해서 잊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잊고 싶지 않아서. 이 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나는 [[민현숙|엄마]]랑 라플란드였나 파주 카페에서 여행계획을 세우다가 7시까지 시옷책방에 갔다. 6시 59분에 나는 태국 선교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된 재윤에게 망고맨 오고 있어? 라고 카톡을 했다. 그랬더니 나는 좀 일찍 도착할 것 같아, 가족이랑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어, 그런 답이 왔다. 나는 ? 상태가 되어서 하지만 수업은 7시고 지금 7시인걸? 같은 말을 했다. 재윤은 수업을 9시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 점이 굉장히 현재진행형 ADHD 같다, 시옷책방 수업 와서 수업 시작 큐를 못 잡고 책을 구경하던 순간이나 만두국 먹으러 들어가서 나나 직원을 신경쓰지 않고 다른 자리 쪽으로 한참 가고 있던 것도) 재윤은 결국 한 시간쯤 늦게 왔고 도착하자마자 내 왼쪽 자리에 앉았다. 나는 처음에 재윤의 몸이 내 왼쪽에 앉았을 때 심장이 너무 뛰거나 하지 않아서 오, 드디어 난 재윤의 존재가 그저 그렇고 괜찮아진 걸까, 생각했다. 역시나 시간이 갈수록 전혀 괜찮지 않음이 증명됐다. 이 날은 수업 안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새로 등장한 W이라는 사람이 한물 간 30대 여배우와 막 호스트바 생활에 뛰어든 19살 남자의 관계에 대한 극을 써왔다. 그 여자를 내가, 남자를 재윤이 읽게 됐다. 그냥 사랑 이야기라는 것만 짐작하고 읽게 됐는데 여자가 남자를 호스트바에서 처음 만나서 여자가 남자를 능숙하게 다루는 장면부터 너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고, 섹슈얼한 대사도 있었고, 전체적으로도 욕망에 대한 이야기여서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앞뒤 맥락을 파악하며 말맛을 살려 읽는 데 열중했고 재윤도 의외로 집중해서 연기했다. 남자가 여자와 주고받는 대사들 밑에서 재윤과 내가 주고받는 어지러운 에너지가 느껴졌다. 재윤이 내는 목소리의 질감이나 크기나 울림이 나를 덮쳐왔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수업에서 터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둘만 있는 공간이었다면 나는 터졌을 것이다. 앞으로 고꾸라지든지 고함을 지르든지 재윤을 베어먹기 시작하든지간에 폭발했을 것이다. 극은 무사히 끝났고 사람들이 잘 읽는다고 이야기해줬다. 나는 압력밥솥처럼 천천히 내압을 뺐다. 수업이 끝나고 [[T|T]]가 또 둘을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게 됐다. [[T|T]]는 재윤에 관심이 많고 재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태워다 줬을 때 배우 잘 하실 것 같아요, 말한다든지 이 날은 하마구치 류스케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재윤과 나는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200번을 탔다. 어떤 버스가 먼저 오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파주에서 합정으로 바로 가는) 2200번이 먼저 왔으면 이 날은 아마 인사하고 타고 바로 집에 갔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재윤에 대한 마음을 잠재우기로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주에서 대화 주엽을 거쳐 합정에 가는) 200번이 와서 같이 탔다. 이야기는 늘 그렇듯 끊이지 않았다. 카레 향신료를 공구할까 이야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창밖의 풍경이 대화역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해했던 기억은 난다. 대화역을 지날 때 어 대화역 다 왔네, 그랬더니 재윤이 너 오늘도 엄마 집 가? 묻는 것이었다. (엄마 집은 재윤의 집과 가깝다.) 아니, 오늘은 집에 가려고, 라고 말하는 대신에 생각중이야, 라고 내 입은 말했다. 재윤이 카레 향신료 지금 가져갈래? 해서 나는 그럴까? 하고 주섬주섬 백병원에 같이 내렸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내가 감각하기에는 서로에게 끌려갔던 것 같지만 검증된 것만 말하고 싶으니 일단 내가 끌려가는 형국에 집중해보겠다.) 내려서 재윤의 집으로 같이 걷는데 이게 맞나, 이게 어디로 가나 싶은 희미한 회의가 올라왔지만 우리는 계속 걸었기 때문에 그 리듬에 회의가 밀려났다. 재윤과 같이 사는 친구는 열시 후반에 온다고 했고 사람을 맘대로 들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해서 그 전에 나가야겠다 싶었다. 집은 넓고 깨끗했다. 짐들이 있었지만 거실이 널찍하고 빈 공간이 많아서 어지럽지 않았다. 부엌에 가서 재윤이 카레 스파이스 박스를 꺼내서 이것저것 나눠줬다. 머스터드 씨드, 호라파, 커리잎 같은 것들. 나는 재윤이 아직 안 산 것들을 확인하고 이거랑 이걸 내가 사서 너한테 나눠줄게, 그러고 챙겨서 일어섰다. 여름밤 에어컨을 안 켠 집은 더웠고 땀이 계속 났다. 나는 손수건으로 땀을 계속 닦으며 얘기를 하고 향신료를 챙겼다. 그 집에서 나오는데 재윤이 따라나왔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재윤이 자기는 백몇십만원 주고 페르시안이었나 무슨 아름다운 품종묘를 데려올 거고 고양이 알레르기 검사도 받으러 간다고 했다. 입양 하기 싫고 자기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말이 좀 시원하고 웃겨서 나는 너 나치같은 새끼구나, 그랬다. 그리고 너는 사실 자아가 엄청 센 사람인데 너무 억압이 많고 힘든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 거 아냐? 식의 말도 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다락방을 기도실로 만든다더니 만들었냐 물었고 재윤은 그 방이 지금 화실로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 선교에 다녀와서 소진된 몸과 마음으로 거기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더니 지금 볼래? 라고 했다. 어 어 그럴까 하다가 어느새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곧 화실 안이었다. 바닥에는 쓰레기봉투가 깔려 있었고 젯소 병 같은 것들이 있었고 캔버스 두 개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둘 다 청회색조에 가까운 색이었고 하나는 의자들, 하나는 구불구불한 선들이었는데 재윤이 그 선들은 골든리트리버 같은 거라고 했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지 그 그림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방은 분명히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방은 또 엄청나게 더웠다. 내 눈에는 최고기온 36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에 이 방에 틀어박혀 토하듯이 그림을 그리는 재윤이 자꾸 보였고 나는 병이다 병, 같은 말을 나지막히 뱉었던 것 같다. 그 방은 모든 것의 압력이 높았다. 덥고 위험했다. 거기서 우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거나 서로를 까득거리며 씹어먹기 시작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세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퇴로를 향해 몸을 틀었고 재윤은 뭔가 이 방에 미련이 남은 듯 싶었지만 나는 갈까? 했고 우리는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재윤이 현관에 잠깐 서 있길래 나는 여기서 인사를 하나보다 생각했지만 재윤은 곧 따라나왔고 우리는 큰길가 공원을 향해 걸었다. 우리는 그 손바닥만한 공원을 한참이나 돌았다. 한참 얘기하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이리로 갈까? 해서 그리로 갔다가 또 길을 선택해야 하면 여기로 갈까? 하면서 그 작은 공원에서 앉지도 않고 불규칙 탑돌이 같은 걸 하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잘 들은 게 맞다면, 재윤은 태국 선교 가기 전에 아빠 앞에서 울면서 가기 싫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재윤에게 아빠는 엄청 큰 벽인가보다. 그런데 결국 갔고 가서도 정말 힘들었지만 어떤 상승을 겪은 것 같았다. 주님에게 좀 더 가까워지는. 그런데 재윤은 평화를 얻은 것 같지는 않았고 그 후 8월 12일에 모처럼 [[29.5]] 5명이 우리집에서 모이기로 한 걸 그 며칠 전에 재윤이 건강상의 문제가 있다고 파토를 냈다. 그 위기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서 재윤이 8월 15일에 본인이 카톡으로 한 표현을 빌리면 평화의 동이 트고 있다고 한다. 재윤은 내가 껍질 벗는 가재라고도 했다. 몇십 분의 탑돌이 끝에 재윤을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식으로 길을 꺾으려는데 재윤이 나에게 엄마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저기 롯데마트 뒤 8단지, 금방이라고 했다. 그럼 오늘은 저기까지 가볼까? 재윤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 가는 길 말고 6단지 쪽 공원길로 재윤을 끌고 갔다. 밤에 사람 없는 공원길을 걸으면 좋을 것 같았다. 공원길은 매미들의 소리가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걷다가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잠깐 서 있었다. 그러다가 큰놀이터쯤 와서 모퉁이를 돌았는데 8단지 무슨 동 옆구리에 달이 걸려 있었다. 정말 밝은 달이었다. 그 달빛 때문에 아파트 건물이 약간 휘어 보였다. 나는 달 사진을 찍었다. 재윤도 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달 사진을 찍었다. 둘 다 사진에 크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때 감각과 도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눈이라는 도구로 이걸 기억하도록 하자, 재윤이 대충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이 엄청나게 연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동으로 마음을 약간 방어했다. 그리고 동화어린이집 길을 지나려고 했는데 동화어린이집은 폐쇄되었고 덤불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태연한 척을 했지만 재윤을 데리고 온 길은 사실 내가 평소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들킨 것 같아 희미하게 수치스러웠다. 8단지 뒷문 샛길까지 함께 걸어갔다. 이 쯤에 재윤은 나에게 내일은 뭐 하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윤과 인사를 하고 재윤이 돌아서서 걸어갔고 나는 재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샛길로 들어와서, 지금 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면 재윤이 가는 길을 가야 하니까 못 가겠고, 정말 [[민현숙|엄마]]한테 가볼까 하고 엄마에게 올라가도 되냐고 전화를 하고 올라갔다. 엄마 옆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엄마가 자꾸 뭐냐고 물어서 나는 내가 재윤을 좋아하는 것 같아, 하며 말머리를 열었다. 이어서 내 입으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을 내 귀로 들으며 판단된 것들이 있었다. 내가 재윤에게 끌리는 마음을 온 힘을 다해 누르고 울고 하는 동안에 [[장제이|J]]는 [[정은영|E]]랑 스키장 가고 술 먹고 콘서트 가고 내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서 더 야속했다는 얘기를 하다가 명확해진 것은, 재윤과 [[장제이|J]]/[[정은영|E]]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내가 [[장제이|J]]와 [[정은영|E]]를 끊어내는 게 오랫동안 두려웠다는 것. 나는 새벽까지 울면서 이야기를 하고 첫차 시간까지 자려고 했는데 한 숨도 못 잤고 엄마가 새벽 4시반쯤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나는 며칠 뒤 [[장제이|J]] 그리고 [[정은영|E]]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