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화요일 아침 11시 반쯤 일어나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런 시간에 [[이재윤]]이 내 옆에 있고 그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그렸었군. 비와 바람과 재윤은 정말 내 무의식에 뗄레야 뗄 수 없이 뭉쳐있을 것이다. 재윤을 사랑하고 그 가능성들을 그려보는 시간은 달콤했다. 어제 놀이터에서 나눈 대화가 꿈 같다. 열시 반쯤 수업이 끝났는데 재윤과 인사를 하고 집에 어떻게 가냐 했을 때가 12시 20분이었다. 내 모든 크러시들과 열병들에 대해 이 정도로 용기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까? 재윤은 나를 잠재적 연애상대 후보군 근처에도 놓아보지 않은 게 분명했고 다만 나와 친구인 것이 정말 좋아 보였다. 나와 같이 작업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관계가 자신에게 그렇게 편안하고 좋게 느껴졌던 걸까? 싶어 살짝 붕괴가 온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 좀 더 신랄하게 문제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 이재윤에 대한 인간 김예지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마음을 꺼내놓기 전에 내가 카톡으로 너무 귀찮게 하면 답장을 다 안해도 된다고 하니 별로 귀찮지 않고 어차피 집에 가서 핸드폰을 잘 안 본다는 말이 좀 좋았다. 나도 그 점은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너에 대한 일기들이 몇 갠지 알면 너가 정말 ... " 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를 더듬더듬, 그러나 또박또박 해냈을 때 재윤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곤란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놀이터에서 재윤도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이해하고 소화하고 대답을 하는 데에 에너지를 꽤 많이 썼던 것 같다. 짧은 비디오를 찍었는데 아직은 못 보겠다. 좀 숙성이 되고 나서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재윤은 자기가 비겁하고 회피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밀고 들어오는 사람의 마음을 거절할 때에는 으레 자기혐오를 늘어놓게 되는 걸까? 어쨌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른 갖가지 말들로 내가 그간 앓아온 병을 이야기했다. 나는 더 정확하게 두괄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널 좋아해, 너에게 빠져 있어, 널 사랑해, 하는 말들을 해야 된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런 점에서 재윤이 나를 보고 어딘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어마어마하게 비겁한 구석이 있지만 멋있다고 중얼거리듯이 이야기한 것 같다. 나는 재윤 앞에 사랑을 쏟아놓았고 재윤은 나에게 경의 비슷한 걸 표했다. 나는 재윤과 아주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약간의 환상을 남겨놓고. 그 환상을 천천히 잊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