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에서 [[이재윤|재윤]]을 만났다. 1번 출구로 나오는 재윤의 모습이 진짜로 예뻤다. 변백주 좋아하던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눈을 너무 보면 뭔가 들킬 것 같아서 바닥이나 핸드폰을 보면서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다. 버스 타기 전에 재윤이 생과일주스가 땡긴다고 해서 샐러디에 들렀다. 내 것도 사준다고 말했는데 내가 두 번이나 거절했다.
샐러디에서 나오는 길에 재윤이 내 물통에 뭐가 들었는지 물었다. 얼음물이라고, 차를 우려 나오려고 했는데 차를 우리면 늦을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고 말했더니 재윤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티백들을 꺼냈다. 주머니에 티백이 네 개나 있었다. 오설록 우롱차를 발견하고 오! 우롱차! 하고 그걸 집었더니 오설록 홍차도 줬다. 자기 집에 많다며. 내가 끈을 뜯어 얼음물에 넣는 걸 보고 뜨거운 물이야? 찬물에? 돼? 하고 물었다. 찬물 먹어본 적 없는 중국 애랑 대화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날 [[킨 뉴포트 블루|파란 샌들]]을 신고 갔다. 합정에서 만나서 버스를 기다릴 때 재윤은 내 샌들을 보고 엄청난 샌들을 신었잖아? 그런 말을 했고 자기도 샌들을 신을까 했는데 이삿짐 속에 있어 찾을 수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합정에서 파주까지 2200번을 타고 가면서 주로 재윤이 이야기를 많이 하고 나는 종종 질문을 하고 말을 얹었다. 재윤은 행신에서 대화로 이사를 했고, 가족이랑 쉽지 않고, 알레르기 검사를 했고, 엄마의 건강 노력에 대한 복잡한 입장도 말했다. 난징에서 룸메이트였던 친구랑 같이 살게 됐고 그 친구랑 동기화를 할 거라는 이야기도 했고. 그 친구는 유튜브 쪽 일을 하고 자기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연결을 지었는데 그걸 들으면서 나는 과도한 의미부여 아닌가,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는 좀 피로하고 집중하기 어려웠다. 나는 열심히 뭔가를 말하는 재윤의 얼굴과 먹구름 낀 하늘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얼굴을 오래 뚫어져라 보면 이상해 보일까봐 하늘도 종종 봤다. 재윤의 이야기가 끊겼고 나는 날씨 좋다 라고 말하는 상상만 속으로 다섯번쯤 하고 날씨 좋다 라고 말했다.
재윤이 난징에서 동역자 한 명만 달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남자로 달라고 했다고 해서 왜? 물었더니 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여자면 복잡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남자는 룸메이트도 할 수 있고 어쩌고. 그리고 난징에서 자기가 새내기들 담당이어서 엄청나게 아는 사람들이 많고 오토바이 타고 캠퍼스 돌아다니면 계속 인사하고 그랬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 재윤의 여자관계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도 있어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인기가 많았고 친구도 많았는데 이런거 다 필요없고 한 명만 내려주세요 그랬다고 했다. 그러다 만난 친구랑 룸메이트가 됐고 지금 같이 살게 된 거라고. 그 친구는 엄청난 안티크리스챤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엔 기독교에서 뭘 빼먹을까 하는 태도였고. 재윤은 기독교가 어떻게 삶을 다 던질 때 최고 효율이 나는지에 대해서 말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서 개성손만두까지 걸어갔다. 계란과 유제품에 알레르기가 있는 걸 최근에 알았다고 했는데 식당 가서 그런 걸 묻는 게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내가 식당 가는 길에 대신 전화를 걸어 만두에 계란 들어가냐고 물었다. 안 들어간다고 해서 기쁘게 식당에 갔다. 자리를 고르는데 재윤은 벌써 저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재윤을 불러서 점원이 안내해주는 쪽으로 가서 앉았다. 만두전골 2인분을 먼저 시키고 고민하다가 콩국수 하나도 시켰다. 콩국수 시키고 그 다음에 공기밥도 추가로 시키면서 재윤이 목소리 높여 주문을 잘 못 하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 벨을 찾는 척 하면서 연극적으로 식탁을 더듬거리고 곤란해하는 모습이 좀 웃기고 좋았다. 장단콩 콩국수에 대한 설명이 벽에 붙어 있었는데 장단콩은 파주에서 인삼, 쌀과 함께 임금님에게 진상한 세 가지 흰 음식 중에 하나라고 되어 있어서 그 얘길 하다가 내가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저육잡증 실습 수업 들은 얘길 했다. 옛날에는 마늘이나 설탕 같은 것도 안 썼고 그러니까 임금님한테 진상하는 음식도 그렇게 대단한 맛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내가 혜경궁 홍씨의 생일에 음식 가짓수가 왕보다 훨씬 많은 칠십 몇가지였다고 하니까 그럼 자기는 옛날 음식 먹어보고 싶으니까 타임머신 타면 혜경궁 홍씨 생일로 가겠다고 했다.
밥을 열심히 먹고 계산하고 나왔는데 비가 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가방 커버를 씌우고 모자를 쓰고 걸으려고 했는데 재윤이 우산을 써야겠다며 자기 우산을 펼쳐 나까지 씌워줬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메는게 어때, 했고 재윤이 아! 하고 내가 우산을 잠시 들고 재윤은 가방을 앞으로 멨다. 그리고 우리는 우산을 같이 쓰고 팔을 자꾸 부딪히며 시옷책방까지 걸었다. 재윤과의 거리가 엄청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비를 너무 안 맞는 느낌이어서 재윤의 왼쪽 어깨가 젖었는지 확인도 했다.
가는 동안 우리는 쉴새없이 주변의 것들을 보고 뭐라고 말하고 농담하고 웃고 그랬다. 재윤은 내가 웃겨하는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약간 흐름에 휩쓸려 오바하는 소위 뇌절 식의 멘트를 하는 걸 몇번 봤다. 근데 재윤이 유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들과 행동이 웃기다. 재윤과의 소통은 늘 편안하지는 않다. 재윤의 언어는 어딘가 울퉁불퉁하다.
시옷책방에 도착했다. 재윤은 만두전골이 탈이 난 모양이었다. [[T|T]]가 담배 피고 돌아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재윤이 한참 안 나왔다.
나는 왠지 S, [[T|T]], N와 더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안경을 손에 쥐고 있어서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재윤과 걸어와서 그런지, 방어막이 좀 내려간 느낌이었다.
수업은 9시 좀 넘어서 끝났다. 나는 재윤을 4시 40분쯤 만났는데 이 날은 10시 반 넘어서 헤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T|T]]가 재윤에게 비가 꽤 오는데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줄까 하고 물었고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해서 같이 교하의 버스정류장까지 배달되었다. [[T|T]]가 운전하면서 재윤에게 배우 잘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어떤 걸 보고 저렇게 말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정류장에 내려서는 66번이 금방 와서 이거 오래걸리는데 탈까말까 했지만 그냥 타버렸다.
66번 버스에 타서 나는 재윤의 팔을 엄청나게 관찰했다. 간호사들이 좋아할 것 같은 핏줄 잘 드러나는 팔이었다. 지난번 수업때 노트에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재윤은 왼손목에 검정 지쇼크 시계를 차고 오른손목에는 검정 하양 비즈로 된 팔찌를 했다. 우리 둘 다 앞자리 등받이에 팔을 걸쳐 쭉 뻗고 갔다. 전기버스여서 정지했을 때 버스가 너무 조용해져서 속삭이듯 말해야 하는 게 재미있었다.
재윤은 염원하던 카레책을 샀고 우린 그걸 구경했다. 근데 그 저자가 운영하는 게 내가 가보고 싶었던 성북동의 카레 라는 카레집이었다. 재윤은 점점점점점점을 맛있게 먹었고 큔에 가보고싶다고 했는데 일월 쉬는 음식점이 많아서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고 했다. 나는 일인용 텐트 짊어지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자고 싶다는 얘기와 유럽여행 할 때 노푸 한달 하다가 샴푸로 감으니까 시원했다는 말도 했다. 재윤도 노푸를 오래 했다고 한다. 재윤은 난징에서 자기가 왓슨스에서 로션을 사서 몇 달을 엄청 열심히 발랐는데 그게 알고보니 클렌저여서 그때 피부가 망가진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얘길 했다. 원래는 엄청 하얗다고도 했다. 나는 재윤의 얼굴을 보고 지금도 좋은데 라는 식의 얘기를 하려다가 뭔가를 들키지 않고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재윤과 함께 백병원에 내렸다. 엄마네 집 간다는 명목으로 바로 합정으로 가지 않고 이 노선에 같이 탄 것이었는데 애초에 나는 별로 엄마네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66번 버스에서 나는 물었다. 너는 뭘 목말라해? 재윤은 쓸모있다는 확인에 목말라한다고 말했다.
백병원에 내려서 계속 걸으면서 얘기했다. 내 쓸모를 내가 인정해주면 되잖아. 그런데 너의 세계에는 (신이 있으니까) 쓸모의 의미가 다르겠다. 식의 말을 했다. 근데 재윤도 그렇지, 내 쓸모를 내가 알아주면 되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다가 너 집 저쪽으로 가야되는 거 아니야? 그랬더니 재윤이 잠시 말이 없더니 한참 재밌는 얘기 중이어서. 좀 걸을까? 그랬다.
나는 요새 과학자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관찰 측정 가설 세우고 실험 증명 수정 같은 걸 한다고. 근데 관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그리고 인간 종 전반에 통하는 규칙의 발견 같은 건 관심없고 나에 대해 알고 싶어서 노력중이라고. 그러다가 내가 스스로의 욕구를 바로 억제하는 생각 패턴이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어떤 생각을 하다가 그만해. 죽어. 라고 한다든지. 재윤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다. 나는 좀 생각하다가,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져서 그런 것 아닐까 한다고도 얘기하고. 어느 날 내방에 피흘리며 죽어있는 나를 누가 발견하는 상상을 했는데 그게 너무 비참했다고.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본다고. 상상 속 죽어있는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 [[장제이|J]]라는 사실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다 흘려도 내가 숟가락 잡고 먹어야 하고 어린이 때도 욕심 많고 왕성했다고.
재윤이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듯한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내가 스스로를 왜 보잘것없게 여기기 시작했는지 그 점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나는 아마도 가족의 평화를, 엄마를 못 지켜서이지 않았을까, 그랬다. 근데 나중에 보니까 되게 복잡한 구도였고, 카메라를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을 수 있는 건데, 하면서 휙휙 앞을 뒤를 찍는 시늉을 하다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어딘가를 올려 찍으며 근데 어린이 나는 이렇게밖에 못 보니까, 했다. 이 카메라 비유에 재윤이 아 그렇지, 하면서 좀 웃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재윤의 집앞까지 왔고 재윤이 내일부터 아침 7시반을 다닐 거라는 요가 학원 밖을 구경했다. 약간 인사 타이밍이 웃기게 되어서 재윤이랑 악수를 한 번 하고 에 너도 여기로 가? 하다가 말을 좀 하면서 걷다가 재윤 집앞 다 와서 또 악수를 했다. 두 번째 악수를 하기 전에는 진심으로 재윤을 안고 싶었다. 그렇지만 재윤을 꽉 끌어안는 대신 어정쩡하고 이상한 악수를 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재윤의 뒷모습을 좀 보다가 걷다가 다시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재윤이 손을 흔들고 있는 듯 해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카톡으로는 저녁값을 얼마 보내야 할지 물었고 내가 가다가 물웅덩이를 밟았다고 했다. 샌들을 신어야 했는 이유를 하나 만들었군, 그러길래 내가 시제가 굉장히 복잡한 문장이군, 그랬더니 재윤이 이미 이루어진 미래를 위한 샌들이었어, 그랬다.